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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 4대의 대제사장 임명권(AD15년-AD26년)

blessing u 2019. 11. 25. 09:09

 

유대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 4대의 대제사장 임명권(AD15년-AD26년)

발레리우스 그라투스는 AD15년 디베료 황제에 의해 루푸스의 후임으로 유대 총독직에 올랐으며 그가 재임한 11년 동안 4명의 대제사장을 임명하였다

헤롯 아켈라오가 가이사 아구스도에 의해 추방된 후 그가 통치하던 유대와 사마리아는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된다.

로마 총독은 세금 징수를 위해 많은 세리를 고용했으며 납세를 위한 대규모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큰 반발을 사기도 했다(행 5:37).

또한 유대 통치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유대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 임명권을 갖기도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임명했던 대제사장이 바로 예수님을 못 박도록 내어준 안나스의 사위 요셉 가야바이다

유대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는 AD15년, 안나스 대제사장을 해임하였지만 후임으로 안나스 집안사람을 배제하지 않았다

1). 60대 이스마엘 대제사장 (AD15년-AD16년 파비의 아들 이스마엘)

이스마엘은 파비가문의 두 번째 대제사장이다 유대 총독 그라투스가 최초 임명한 대제사장으로 임명받은 지 얼마 못되어 해임되었다

동일한 가문과 동일한 이름으로 AD15년-AD16년에 대제사장이던 자가 있었다.

당시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을 포함한 지도자들 사이에 일어난 파벌싸움이 폭력사태로 번졌다

이로 인해 나라 안은 무정부 상태와 같은 극한 혼란에 빠져 정의가 공의가 완전히 짓밟히고 말았다

극도로 타락한 대제사장들은 타작마당에 노예들을 보내 제사장들이 받아야 할 십일조를 중간에서 무자비하게 가로챘다

2). 61대 엘르아살 대제사장 (AD16년-AD17년 안나스의 첫째 아들 엘르아살)

엘르아살은 안나스의 다섯 아들 중 중 처음으로 대제사장이 되었다 AD16년 유대 총독 그라투스가 임명하였으며 AD17년까지 약 1년 정도 직무 하였다.

3). 62대 시몬 대제사장 (AD17년-AD18년 카밋의 아들 시몬)

카밋의 아들 시몬은 AD.17년 유대 총독 그라투스가 임명하였으며 AD18년까지 약 1년 정도 재임하였다

탈무드에 속죄일 전날 밤에 대제사장 시몬이 이방 아랍 왕에게로 나아가 말씀드렸는데 그때 “이방 왕의 침이 그의 예복에 떨어져서 부정케 됨으로 그의 형제인 유다가 대신하여 속죄일에 성소에 들어가 직무를 수행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 이 사건은 그들이 대제사장의 예복을 매우 신성시했던 것을 말해준다

그는 1년에 단 한 번뿐인 속죄일에 가장 중요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보지도 못하고 해임되는 것이다

4). 63대 시몬 요셉 가야바 대제사장 (AD18년-AD36년 안나스 사위 가야바)

요셉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로 안나스 집안의 세 번째 대제사장이다 (마26:3,57.눅3:2. 요 11:49. 요 18:13-요 14.24.28. 행 4:6)

요셉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마 26:59)로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온 공회는 산헤드린을 뜻하며 당시 가야바는 대제사장으로서 산헤드린의 최고 의장이었다.

AD18년 본디오 빌라도의 전임총독 빌레리우스 그라투스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라투스가 떠나고 본디오 빌라도 (AD26년-AD36년 )가 새 총독으로 온 이후에도 여전히 파직되지 않고 AD18년-AD36년까지 약 18년간 대제사장으로 활동하였다(눅 3:1-2)

그는 유대의 최고 종교 지도자였고 정치가와 외교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었으며 수리아 총독 비탤리우스에 의해 면직되었다.

요 11:47-53에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예수를 처리할 방도를 찾고 있을 때 가야바가 등장하며 백성들은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였다(마 26:3)

마 26:59에는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며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온 공회는 산해드린을 뜻하며 당시 가야바는 대제사장으로서 산헤드린의 최고의 의장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형 판결은 대제사장 중심의 산헤드린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